대인플레이션 시대를 마감하고 ‘대완화(Great Moderation)’의 서막을 연 1985~1986년, 저금리·저유가·달러약세의 ‘3저 호재’가 이끈 미국 증시의 구조적 호황을 심층 분석합니다. 플라자 합의와 세제개혁법 등 정책적 대전환이 만들어낸 거시경제의 역동성과 그 투자적 함의를 확인해 보십시오
대전환의 경제학: 1985~1986년 레이건 행정부의 정책적 혁신과 거시경제적 역동성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행정부의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1985년부터 1986년까지의 기간은 미국 현대 경제사에서 가장 중대한 변곡점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 시기는 1970년대의 ‘대인플레이션(Great Inflation)’ 시대가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하고, 물가 안정과 지속적 성장이 공존하는 ‘대완화(Great Moderation)’의 서막이 오른 시기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1기 임기 동안 폴 볼커(Paul Volcker) 연방준비제도 의장의 고금리 정책을 지지하며 물가를 잡는 데 성공했고, 2기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세 구조의 근본적인 재편, 국제 통화 질서의 인위적 조정, 그리고 에너지 시장의 질서 재편을 시도했다. 본 보고서는 1985~1986년의 거시경제 환경을 분석하기 위해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 전환, 세제 개혁의 단행, 외환 시장의 플라자 합의, 에너지 시장의 유가 급락, 그리고 자본 시장의 장기 호황과 정치적 변수라는 다섯 가지 핵심 축을 중심으로 심층적인 통찰을 제공하고자 한다.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 기조 전환과 기준금리 인하의 메커니즘
1980년대 중반 미국의 통화 정책은 과거의 ‘인플레이션 파이터’ 모드에서 ‘성장 관리자’ 모드로 서서히 전환되고 있었다. 1980년 14.6%에 달했던 소비자물가상승률(CPI)이 1986년에는 2% 미만으로 급락하면서, 연방준비제도는 금리 인하를 통해 경기 확장을 지속할 수 있는 정책적 공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기준금리 인하의 구체적 시점과 단계적 경로
1985년 초 미국 경제는 다소 복합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1984년의 강력한 회복세 이후, 1985년 상반기 실질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은 1% 수준으로 급격히 둔화되었다. 이러한 성장 둔화는 국내 수요는 견조했으나 달러 강세로 인한 수입 급증이 국내 생산을 잠식한 결과였다. 이에 연준은 1985년 2분기부터 본격적인 금리 인하 기조로 돌아섰다.
1985년 3월 기준금리가 연고점을 기록한 이후, 연준은 경제 지표의 부진과 기업 대출 수요의 감소를 확인하며 정책 금리를 하향 조정하기 시작했다. 특히 1985년 5월 20일, 연준은 재할인율(Discount Rate)을 인하하며 시장에 강력한 완화 신호를 보냈고, 연방기금금리는 7.75%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후 1985년 하반기에는 경제가 다소 회복세를 보이며 12월에 금리가 잠시 8.0%로 미세 조정되기도 했으나, 전반적인 하향 추세는 1986년까지 이어졌다. 1986년 한 해 동안 연준은 네 차례에 걸쳐 재할인율을 인하했고, 이는 1986년 말 기준금리가 6% 수준까지 낮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 시기 | 연방기금금리(FFR) 타겟/범위 | 주요 배경 및 정책적 동기 |
| 1984년 11월 | 10.0% 이상 | 인플레이션 억제 후 고금리 유지 단계의 종료 |
| 1985년 3월 | 연고점 기록 | 기업 신용 수요 일시 증가 및 준비금 압박 |
| 1985년 5월 | 7.75% | 경제 성장 둔화(1%대) 및 재할인율 인하 단행 |
| 1985년 12월 | 8.0% | 4분기 경기 회복 조짐에 따른 일시적 미세 조정 |
| 1986년 말 | 6.0% | 플라자 합의 이행 지원 및 저물가 기반의 경기 부양 |
기준금리 인하의 결정적 사유와 경제적 함의
첫 번째 이유는 앞서 언급한 물가의 완벽한 통제였다. 폴 볼커 의장은 1982년까지 통화량 목표제를 통해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꺾어놓았으며, 1983년부터는 이른바 ‘이자율 부드럽게 하기(Interest Rate Smoothing)’ 기조를 통해 금리 변동성을 줄이며 하향 안정화를 꾀했다. 1986년의 물가 안정은 실질 금리를 높게 유지할 명분을 없앴다.
두 번째 이유는 ‘달러 강세의 부작용’ 해소였다. 고금리로 인해 유입된 해외 자본은 달러 가치를 비정상적으로 높였고, 이는 미국 제조업의 수출 경쟁력을 파괴했다. 연준은 금리 인하를 통해 달러의 매력도를 낮춤으로써 무역 적자 해소를 도모하고자 했다. 세 번째 이유는 실업률과 자원 이용률의 개선 속도가 더디다는 점이었다. 1985년 11월 실업률은 7.0%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며, 제조 부문의 고용은 오히려 감소하고 있었다. 연준은 자원 사용의 비효율성을 줄이기 위해 보다 수용적인 통화 정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986년 세제개혁법(TRA 86)의 도입과 조세 패러다임의 혁명
레이건 2기 경제 정책의 백미는 1986년 10월 22일 서명된 ‘1986년 세제개혁법(Tax Reform Act of 1986)’이다. 이 법안은 단순한 감세가 아니라 미국 조세 체계의 근본을 바꾸는 ‘세수 중립적(Revenue Neutral)’ 개혁을 지향했다.
세제 개혁의 주요 내용과 세율 구조의 변화
TRA 86의 가장 충격적인 조치는 개인 소득세율의 대폭적인 인하와 단순화였다. 이전까지 최고 50%에 달했던 개인 소득세 최고 한계세율을 28%로 전격 인하했다. 반면, 최저 세율은 11%에서 15%로 인상되었는데, 이는 미국 역사상 최고 세율은 낮추고 최저 세율은 높인 유일한 사례로 남았다. 또한 기존의 복잡했던 다단계 세율 구간을 단 두 개(15%, 28%)로 통합하여 조세의 투명성을 높였다.
법인세 분야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최고 법인세율은 46%에서 34%로 인하되었다. 그러나 법인세율 인하에도 불구하고 각종 투자 세액 공제와 가속 감가상각 혜택을 폐지하거나 축소함으로써, 전체적인 세 부담은 개인에서 기업으로 전이되는 효과를 낳았다. 특히 장기 자본이득(Capital Gains)에 대한 우대 세율을 폐지하고 일반 소득과 동일하게 과세하기 시작한 것은 투자 시장에 큰 충격을 주었다.
| 항목 | 개혁 이전 (Pre-TRA 86) | 개혁 이후 (Post-TRA 86) | 주요 변화의 특징 |
| 개인 소득세 최고세율 | 50% | 28% (일부 33% 적용) | 한계세율의 급격한 인하와 구간 단순화 |
| 개인 소득세 최저세율 | 11% | 15% | 과세 기반 확대를 위한 최저세율 인상 |
| 최고 법인세율 | 46% | 34% (후에 35%) | 명목 세율 인하 및 각종 공제 혜택 폐지 |
| 자본이득세 | 우대 세율 존재 (최고 20%) | 일반 소득과 동일 (최고 28%) | 투자 자산에 대한 우대 혜택 공식 폐지 |
| 조세 구조 성격 | 개인 부담 중심 | 기업 부담 전이 (세수 중립) | 루프홀 제거를 통한 공정 경쟁 유도 |
세제 개혁의 경제적 유인과 시장 기능의 복원
이 개혁의 철학은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드는 것(Leveling the Playing Field)’이었다. 과거에는 복잡한 세금 감면 혜택을 노린 비효율적인 투자가 성행했으나, TRA 86은 이러한 조세 회피성 투자(Tax Shelters)를 차단하고 시장 원리에 따른 자원 배분을 유도하고자 했다. 특히 소극적 활동 손실(Passive Activity Loss) 규정의 도입은 부동산 투기 붐을 억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흥미로운 거시경제적 결과 중 하나는 ‘세율 역전’에 따른 기업 구조의 변화였다. 개인 소득세 최고세율(28%)이 법인세 최고세율(34%)보다 낮아지자, 기업들은 법인 단계에서 세금을 내는 대신 이익을 주주에게 직접 배분하여 개인 소득세로 처리하는 S-법인(S-corporation)이나 파트너십 형태로 전환하는 강력한 유인을 갖게 되었다. 이는 미국 기업 생태계의 유연성을 높이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달러 약세의 지속과 플라자 합의의 지정학적 역동성
1980년대 초반 미국의 고금리와 재정 적자는 달러화 가치를 비정상적으로 높여놓았다. 1980년부터 1985년 초까지 달러는 주요 통화 대비 44% 이상 가치가 상승했다. 이는 미국의 수출 제조업을 붕괴 직전으로 몰아넣었으며, 의회에서는 수입품에 대한 보복 관세를 부과하려는 보호무역주의가 득세하고 있었다.
플라자 합의(1985. 9): 정책적 달러 약세의 시동
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G5 재무장관들이 모여 달러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추기로 합의한 ‘플라자 합의’는 현대 외환 시장의 역사적 사건이다. 제임스 베이커 재무장관은 전임자의 시장 방임주의를 버리고 국가 간 공조를 통한 적극적인 개입을 선택했다. 일본과 독일은 자국 통화의 가치를 올리는 데 동의했고, 미국은 재정 적자를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합의 직후 달러 가치는 급락하기 시작했다. 2년 만에 달러는 엔화와 마르크화 대비 약 25% 이상 절하되었다. 이러한 약세가 지속된 것은 단순히 중앙은행들의 달러 매도 개입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장은 미국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확인했고, 무엇보다 연준의 금리 인하가 달러 자산의 수익률을 낮추며 자본 유출을 촉진했기 때문이었다.
달러 약세의 거시경제적 영향과 ‘쌍둥이 적자’의 해소
플라자 합의 이후 달러 약세가 지속된 또 다른 이유는 미국의 ‘쌍둥이 적자(Twin Deficits)’ 문제였다. 재정 적자와 무역 적자가 동시에 발생하는 상황에서 달러의 가치 하락은 무역 적자를 보전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시장의 압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역 수지가 개선되기까지는 이른바 J-커브(J-Curve) 효과로 인해 1~2년의 시간이 더 소요되었으며, 그동안 달러 가치는 계속해서 하방 압력을 받았다.
| 통화 쌍 | 합의 직전 (1985년 초) | 합의 2년 후 (1987년) | 가치 변화의 특징 |
| USD/JPY | 약 240~250엔 | 약 150엔 이하 | 엔화의 급격한 절상으로 일본 제조업 타격 |
| USD/DEM | 고평가 상태 | 가치 급락 | 독일 마르크화 대비 달러 가치의 체계적 하락 |
| 달러 인덱스 | 역사적 고점 | 약 25% 이상 하락 | 글로벌 무역 불균형 시정을 위한 정책 유도 |
이러한 달러 약세는 미국의 수출 경쟁력을 회복시켜 1989년경에는 무역 적자가 GDP 대비 상당 부분 감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본 입장에서는 급격한 엔고를 방어하기 위해 금리를 인하하고 내수를 부양해야 했으며, 이는 훗날 일본의 거품 경제와 ‘잃어버린 10년’의 단초를 제공하는 양날의 검이 되었다.
1985년 11월 유가 급락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전략적 반격
1985년 말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는 전례 없는 유가 폭락 사태가 발생했다. 1985년 11월 배럴당 30달러 수준이었던 원유 가격은 불과 몇 달 만에 10달러 선까지 붕괴되었다. 이 유가 쇼크는 세계 경제에 엄청난 ‘공급 측 보너스’를 제공했으나, 그 배경에는 처절한 시장 점유율 전쟁이 있었다.
‘스윙 프로듀서’ 사우디의 변심과 넷백 가격제
1980년대 초반까지 사우디아라비아는 OPEC의 가격 지지자로서 다른 국가들이 쿼터를 어기고 증산할 때 혼자 생산량을 줄이며 가격을 방어해왔다. 그 결과 사우디의 생산량은 1980년 하루 1,000만 배럴에서 1985년 여름 200만 배럴 수준까지 추락했다. 사우디의 재정 수입은 80% 이상 급감했고, 더 이상 타국을 위해 희생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985년 9월 13일, 사우디의 자키 야마니 석유장관은 더 이상 가격 유지를 위한 감산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11월부터 본격화된 ‘넷백(Netback) 가격제’의 도입은 시장을 마비시켰다. 넷백 가격제는 정유사들에 원유를 판 뒤, 정유사가 제품을 팔아 남긴 이익에서 비용을 뺀 나머지 금액을 원유 가격으로 사후 정산해주는 방식이었다. 이는 정유사에 무조건적인 수익을 보장함으로써 사우디산 원유의 시장 점유율을 강제로 끌어올리는 공격적인 전략이었다.
1985년 11월 급락의 직접적 원인과 그 파장
1985년 11월 유가가 급락한 직접적인 이유는 사우디가 넷백 계약을 대규모로 체결하며 시장에 원유를 쏟아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후 12월 제네바에서 열린 OPEC 회의에서 회원국들이 ‘가격 고수’ 대신 ‘시장 점유율 확보’를 공식 정책으로 채택하면서 시장은 공포에 휩싸였다. 가격은 1986년 4월 WTI 기준 배럴당 9.95달러까지 떨어졌다.
이 저유가는 미국 경제에 엄청난 활력을 불어넣었다. 생산 원가가 낮아지면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사라졌고, 소비자들은 기름값 절약분을 다른 소비에 쓸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높은 유가를 바탕으로 경제를 유지하던 소련은 외화 벌이에 치명상을 입었으며, 미국의 에너지 관련 기업들은 대규모 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사우디의 이 전략은 결국 비(非)OPEC 산유국들의 증산을 억제하고 OPEC 내 기강을 잡는 데는 성공했으나, 전 세계 에너지 지형을 영구적으로 바꿔놓았다.
자본 시장의 르네상스: S&P 500 상승과 1986년의 특이성 분석
미국 주식 시장은 1982년 8월 저점을 기록한 이후 1987년 9월까지 5년 이상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였다. S&P 500 지수는 이 기간 동안 유동성과 실적 장세의 결합으로 역사적인 랠리를 펼쳤다.
고평가 논란과 밸류에이션의 메커니즘
장기 상승세 속에서 주가 고평가에 대한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S&P 500의 주가수익비율(P/E Ratio)은 평균 10배 내외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986년 주가가 폭등하며 P/E 비율은 14배를 넘어섰고, 1987년 초에는 18배까지 치솟았다. 당시 투자자들에게 18배 이상의 P/E는 미지의 영역이었으며, 밸류에이션 부담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이 상승을 지속할 수 있었던 근거는 금리 하락이었다. 주식의 가치를 평가하는 이론적 도구인 고든 성장 모델($P/E = \frac{DPR}{r-g}$)에 따르면, 할인율($r$)에 해당하는 금리가 낮아지면 주가 배수는 자연스럽게 상승한다. 1986년의 공격적인 기준금리 인하와 저인플레이션 환경은 시장의 높은 밸류에이션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방어 논리가 되었다.
1986년 중간선거의 이례적 성과와 그 이유
미국 증시 역사에서 중간선거 연도는 대개 변동성이 크고 수익률이 저조한 해로 통한다. 선거 전 12개월 동안 S&P 500의 평균 수익률은 0.3%에 불과하며, 정치적 불확실성이 시장을 짓누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1986년은 예외였다. 1985년부터 1986년까지 S&P 500은 연평균 20.3%라는 경이적인 상승률을 기록했다.
이러한 이례적인 성과는 정치보다 강한 ‘경제 펀더멘털’ 덕분이었다. 1986년 미국 경제는 유가 하락, 금리 하락, 달러 약세라는 이른바 ‘3저 호재’를 동시에 누리고 있었다. 실업률은 7%대에서 완만히 하락하고 있었고, 기업들의 이익 전망은 개선되고 있었다. 또한, 비록 민주당이 상원을 탈환하며 분점 정부(Divided Government)가 형성되었으나, 시장은 오히려 급격한 정책 변화가 어려워진 상황(Gridlock)을 긍정적인 안정 신호로 받아들였다.
| 연도 | 대통령 | 중간선거 결과 | S&P 500 연간 수익률 | 시장 환경의 특징 |
| 1982년 | 레이건 (1기) | 공화당 하원 대패 | +1.8% (연초 기준) | 고금리 종료 및 강세장 시작점 |
| 1986년 | 레이건 (2기) | 민주당 상원 탈환 | +20.3% (연간) | 저유가·저금리·달러약세의 골디락스 |
| 1990년 | 부시 | 민주당 의석 확대 | -9.0% (수익률 저조) | 경기 침체 우려 및 유가 상승 |
| 1994년 | 클린턴 | 공화당 압승 | – | 급격한 금리 인상에 따른 시장 위축 |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과 기술주 섹터의 명암
1986년 9월, 미국과 일본은 역사적인 ‘반도체 협정’을 체결했다. 이는 일본 기업들의 덤핑 방지와 일본 시장 내 외국산 제품 점유율 20% 보장을 골자로 했다. 이 협정은 1980년대 중반 위기에 처했던 미국 반도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강력한 ‘관리 무역’ 조치였다.
증시 관점에서 이 협정은 기술주 섹터에 이중적인 신호를 보냈다. 칩을 생산하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나 마이크론 같은 기업들에는 일본의 저가 공세를 막아주는 호재였으나, 칩을 사서 컴퓨터를 만드는 IBM이나 애플 같은 기업들에는 원가 상승을 초래하는 악재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미국 반도체 기업들이 저부가가치 메모리 칩 생산에서 인텔(Intel)과 같은 고부가가치 마이크로프로세서 설계로 빠르게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1990년대 기술주 붐의 토대를 닦는 긍정적인 심리로 이어졌다.
종합: 1980년대 중반 정책 믹스의 유산
1985~1986년의 미국 경제는 레이건 행정부의 공급측 경제학이 글로벌 공조 및 중앙은행의 유연성과 만났을 때 어떤 폭발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이다. 연준은 인플레이션 억제라는 단기적 승리에 안주하지 않고, 금리 인하를 통해 경기 확장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동시에 1986년 세제개혁법을 통해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조세의 형평성을 제고하는 구조적 개혁을 완수했다.
국제적으로는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의 인위적 고평가를 해소함으로써 제조업의 숨통을 틔워주었으며, 에너지 시장에서는 사우디의 전략적 증산으로 유발된 유가 하락이 경제 전반의 비용을 낮추는 거대한 부양책 역할을 했다. 비록 1987년 블랙 먼데이라는 변동성을 겪기도 했으나, 1985-1986년에 구축된 저물가·저금리·고효율의 경제 구조는 미국이 21세기 글로벌 패권을 유지할 수 있는 체력을 기르는 중요한 토양이 되었다. 이 시기의 정책 결정들은 정치가 경제의 펀더멘털과 조화를 이룰 때, 심지어 정치적 불확실성이 큰 중간선거 기간에도 시장이 얼마나 견고하게 성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전형(Paradigm)을 제시하고 있다.